일상다반사/日常事

삼성산 호압사

산물소리 2011. 7. 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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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서울 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전화/팩스  : 02-803-4779

교통편 :

둘레길 따라 가는 경우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3번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 5515(A,B)번을 타고 서울대앞에서 내립니다.

(종점에서 내려 9동,대학동 고시촌을 통해서 가시면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마을버스 종점(9동 현대아파트)->윗동네 고시촌

->헬기장,약수암->천주교 성지->호압사)

관악산 입구에서 관악산 둘레길 2구간 표지 안내에 따라 오르기 시작합니다. 

관악산 입구에서 곧장 가시면 오른 쪽에 둘레길 표시판이 있습니다.

둘레길 표시판 -> 돌산-> 보덕사 ->헬기장(고시생들이 족구.농구하는 넓은 터), 약수암(바로 아래에 약수사가 있음)

->삼호약수터, 천주교 성지 ->이 곳에서 30m 더 가면 둘레길 가는 길 표시가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바로 앞에 조그만 오두막과 베드민턴 연습장이 있는데 이 쪽을 향해 위로 조금만(약7분 정도) 올라가면

호암산,장군봉,삼막사로 향하는 주 등산로가 나옵니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무척 붐비는 등산로입니다.

이 곳에서 바로 발 아래 쪽에 호압사가 있습니다.

호압사는 벽을 대부분 철거해서 안으로 들어가기도 편하고 관악산과 마치 하나가 된 듯 경치가 빼어납니다.

바로 위쪽에 설치된 긴의자에 앉아 발 아래 호압사를 바라보는 경치가 마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6515번, 5517번 버스(서울대입구역 -> 관악구청 -> 관악산입구 -> 시흥 2동 벽산아파트

-> 호압사 입구)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신림역에서 152번 버스(신림역 -> 시흥 2동 벽산아파트 -> 호압사 입구)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초록색 1번마을버스를 이용하여 호압사입구까지 오시면됩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시흥대로 안양방향 -> 시흥4거리에서 좌회전 -> 직진 -> 벽산아파트(좌우)단지 지나서 계속 직진 ->

좌우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신림동쪽으로 직진-> 산복터널 가기전 오른쪽 호압사 산문
신림동 -> 신림역-> 서울대 -> 안양, 시흥동 방면-> 산복터널 -> 호압사입구(안양방면 고가도로 밑으로 유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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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압사 안내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며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며,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호압사의 창건기록으로는 호압사의 본사였던 봉은사에서 엮은 '봉은사 말사지'에서 볼 수 있는데 1407년인 조선태종7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태종임금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출처: 호압사

 

 

이 석불상은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불이다.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돋아나 있는 혹 모양의

살인 육계(肉髻)의 높이가 낮으며 소라 모양으로 꼬인 부처의 머리털인 나발(螺髮)은 촘촘하다. 얼굴은넓은 삭형으로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상체는 단정하며 앞에 모아진 두 손은 여의주를 들고 있다. 왼팔의 옴형문양이나 가슴의

띠매듭 등은 체구의 표현과 함께 조선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얼굴고 무릎 부분이 손상되어 금옷[改金佛事]을 다시 입혔다.

 

 

무학대사(무학자초)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이다. 삼기(지금의 합천) 출생으로 18

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

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

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

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

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

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글: 호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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