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日常事

전주 이씨 온녕군파

산물소리 2009. 10. 25. 18:18

온녕군파(태종대왕 3남) 화보

 

 


온녕군(溫寧君)의 묘

 

 


온녕군(溫寧君) 묘소 석관(石槨)

 

 


온녕군(溫寧君)의 계자 우산군(牛山君)의 묘

 



  온녕군파(태종대왕 3남) 약사

녕군은 1407년(태조 7)에 태종대왕의 3남으로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별세하였다. 신빈(信嬪) 영월신씨 소생이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근녕군(謹寧君)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우산군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를 맞이하여 6남을 둠으로써 후손이 번창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산군과 그 아들 6형제가 함께 참화를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우산군의 차남 무풍군(茂豊君) 총(摠)은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루는 종친 학자이며 예술가로 그의 <지환부(指環賦)>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 내려온다. 무풍군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인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종친이 사류(士類)와 어울려 정치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단천역(端川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또다시 장(杖) 백대를 맞고 거제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아버지 우산군과 형인 용성군, 네 아우 한산군 · 화원군 · 금천군 · 청양군도 모두 먼 섬으로 귀양가고 가족들은 종적(宗籍)에서 삭제되어 모두 서인이 되었다.

이들 7인을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이렇게 7부자가 무풍군 사건으로 모두 귀양을 갔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무풍군은 죽음을 당하고, 그 후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 아버지 우산군과 공의 형제들이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7부자가 비명에 감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나 다행히 그 해 9월 2일 중종반정 때 신원(伸췦)되었다. 그때 우산군에게는 가덕대부에 추증되고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장남에게는 승헌대부 용성군, 차남은 명선대부 무풍도정, 3남은 명선대부 한산도정, 4남은 명선대부 화원도정, 5남에게는 명선대부 금천도정, 6남에게는 명선대부 청양도정에 추증되고, 모두에게 묘지(墓地)가 하사되었다. 그후 1705년(숙종 31)에 7공자에게 각각 정려문이 내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무풍군으로 명의대부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는 무풍군에게 소민(昭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900년(광무 4)에 4남부터 6남까지를 자헌대부 군으로 추증되고, 1910년(순종 4)에는 6형제에게 정민(貞愍) · 충의(忠毅) · 민절(愍節) · 혜정(惠貞) · 효의(孝懿) · 정헌(貞憲)이란 시호가 각각 내려졌다.

우산군 아들 6형제가 모두 후손을 두어 자손이 번창하여 문과급제 5명을 배출했다. 기타 군수 · 현감 · 부사 · 도정 등 중위 급의 관직을 지낸 이가 많고 문집을 남긴 학자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온녕군 후손 중에는 교육자가 비교적 많고 그 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와 대학 교수가 많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세대수
서울,경기
1,311
충북
361
전북
228
충남
2,014
전남
323
강원
95
경북
1,064
경남
95
합계
5,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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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녕군 ' (으)로 검색된 온녕군(溫寧君) 파항렬자 일람표입니다

시조
로부
터:世
선계·
제왕
시조:世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파조:代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3 세 태종
太宗
온녕군
(溫寧君)
치성
致聲 ○冕 ○弼 羲○ ○載 紀○ ○鏞 澤○ ○柱 ○善 ○雲 ○穆 ○憲 ○中 ○章
시조
로부
터:世
선계·
제왕
시조:世 51 52 53 54 55
파조:代 27 28 29 30 31
23 세 태종
太宗
온녕군
(溫寧君)
- -
○宅 ○林 ○旭 - -


  


     * 온녕군(溫寧君) 파의 항렬자 중 병용(항렬)자입니다.
   *15 대 羲○()=承○()  *16 대 ○載()=○相()  *17 대 紀○()=炳○()  *18 대 ○鏞()=○宰()  *19 대 澤○()=鍾○()  *20 대 ○柱()=○漢()  *21 대 ○善()=○東()  *22 대 ○雲()=○炫()  *23 대 ○穆()=○周()  *24 대 ○憲()=○錫()  *25 대 ○中()=○雨()  *26 대 ○章()=○榮()  


대 표 파 종 회 주 소 연 락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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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온녕군(溫寧君)   온녕군派
자료종류 : 4 세약사   생몰 : 1407∼1453   조회수 : 986

 휘는 정(정), 시호는 양혜(良惠). 태종대왕의 3남으로 어머니는 신빈(信嬪) 영월신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종학(宗學)에서 수학할 때 여러 아우들의 모범이 되어 궁중에서도 존중을 받는 왕자였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로 찬성을 지낸 안명(安命)의 딸이다. 그러나 온녕군은 후사가 없어 아우 근녕군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 3거리 서쪽 언덕 술좌에 있었으나 도시 확장 관계로 1962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1 갑좌로 이장했고 배위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90-1 병좌에 있었으나 1988년 대자동으로 옮겨 535년만에 부군과 합폄했다.
 온녕군의 사당은 봉사손이 살던 충남 공주시 신풍면 행정리에 있었으나 15대손 희천(羲天)이 독자적으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에 이건하여 60여 년을 받들어 왔는데, 1988년부터 파종회에서 모시고 있다.

이 름 : 우산군(牛山君)   온녕군派
자료종류 : 4 세약사   생몰 : ? ∼1506   조회수 : 2798

 휘는 종(踵), 자는 계이(繼而), 호는 정재(靜齋), 시호는 정민(貞愍). 온녕군의 계자이며 생부는 근녕군이다. 우산군은 체구가 건장하고 인품이 준수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종실을 상대로 시행하는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하였다.
 오직 절의와 지조를 굳게 가지고 아들들의 훈육에 힘써 당대 석학을 찾아 이들의 학업을 맡겼었다.
 그러나 차남인 무풍군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효수형을 받자, 우산군은 다른 아들 5형제와 함께 남해의 섬으로 귀양갔다가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에 함께 사사되었다. 무풍군을 포함해서 이른바 7공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어 품계가 가덕대부에 이르고 나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시호를 정민(貞愍)이라 받았다.
 배위는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로 효장(孝章)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이 름 : 용성군(龍城君)   온녕군派
자료종류 : 4 세약사   생몰 : ? ∼1506   조회수 : 2430

 휘는 원(援), 자는 문연(文淵), 시호는 정민(貞愍). 우산군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부정(副正)을 받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남해의 고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에 사사되고, 그 해 9월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었다. 이때 군으로 추증되고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1910년에 시호를 받았다. 외아들 운양정(雲陽正)을 두었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로 윤종(允宗)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출처: 전수이씨대동종약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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