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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과 만 원

산물소리 2010. 11. 16. 14:19

제목 숟가락과 만 원


소록도에서 온 편지  
10월 초, 이정신 병원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소록도에 자원봉사를 다녀온 대학생이 보낸 편지였다.  김주호 학생은 봉사 중에 한 한센인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간곡하게 전해달라고 했다며 부탁받은 물건을 함께 넣어 보냈다. 할아버지가 직접 쓴 짧은 메모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할아버지는 1996년 우리 병원에서 뇌졸중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퇴원할 때 수저 하나를 가져왔다며 수저 값을 갚고 싶다고 했다. 입원한 환자에게는 화분을 선물하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이 있다. 병원에 뿌리를 내린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란다. 퇴원할 때 병원 물건을 가져가면 더 이상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예전엔 병원 물건이 종종 없어지는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이 속설을 믿은 것일까?

수소문 끝에 심부름을 한 대학생과 연락이 닿았다. “제가 할아버지께 그랬어요 서울아산병원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고, 잃어버린 숟가락 하나 아무도 신경 안 쓴다구요. 그래도 막무가내셨어요. ” 그러나, 한해 매출 1조 원의 큰 병원을 운영하는 병원장은 소록도에서 온 지폐 한 장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필자는 병원장의 답장을 들고 소록도로 향했다. 


15년을 쓴 숟가락 

최 할아버지(84)를 만나기 위해서는 국립 소록도 병원과 한센인 주민자치회, 그리고, 거주지 주민자치회를 거쳐야 했다. 그 모든 통과의례를 마치고 찾아간 할아버지 집은 방 한 칸 화장실 한 칸, 부엌 겸 작은 거실이 전부인 공동주택이었다. 손가락이 굽은 한센인 할머니(79)가 필자를 맞아주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기저귀를 갈아드린 후 만나는 것이 좋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 닫힌 방안에서는 영차 영차 노부부의 힘쓰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려왔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할아버지는 뇌졸중 때문에 왼쪽 몸이 무너진 상태로 하루 종일 누워서 생활한다. 머리맡에 성경책이 유일한 친구였다. 필자가 자리를 잡고 앉자, 할머니가 문제의 숟가락을 가져왔다.

손잡이가 길지 않은 대신 묵직한 숟가락 하나.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숟가락을 쓴다고 했다. 당시 제수씨가 퇴원 짐을 꾸렸는데, 집에 와보니 있더란다. 속설 때문은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숟가락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고, 숟가락 값을 보내야 한다고 할머니를 채근했다. 숟가락 값 얘기가 듣기 싫어 할머니가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아 좋다며 할아버지는 이 숟가락만 고집했다. 그냥 편하게 쓰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숟가락 값을 보내고 싶었을까? 할아버지의 대답은 마음이 아팠다. 세상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몸은 볼품없어도 영혼만은 깨끗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셨단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면서 몇 천 원만 보내지 그랬냐고 했더니 죄도 이자가 붙는 거라고 했다.


가난한 눈물 

이제 필자가 그 먼 길을 찾아간 이유를 설명할 차례. 가져간 답장을 전해드렸다. 눈이 침침하다며 읽어달라고 했다. ‘서울아산병원 원장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와 현금 잘 받았습니다...’ 답장을 읽기 시작하자, 굵은 눈물 한줄기가 할아버지의 야윈 뺨을 타고 내린다. 그리고 잠시 후, 할아버지는 아기처럼 울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읽을 때였다. ‘받은 돈은 어르신의 이름으로 서울아산병원 사회복지팀에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환자들을 도와주는 부서입니다. 불편한 마음 그만 내려놓으시고 남쪽 바다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오열하던 할아버지가 띄엄띄엄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귀한 곳에 써주다니 고맙고 감사하다고, 죽을 때까지 서울아산병원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쪽 바다 작은 골방에 누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 몹쓸 병에 몸이 썩고 마음이 문드러졌을 분이, 정작 많은 것을 이루고 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지 않는가.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려 할아버지께 여쭸다. “할아버지, 불쌍한 사람 도와준다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 “그럼요. 평생 도움만 받고 살았는데, 불쌍한 사람 도와준다니 듣기만 해도 얼마나 좋아요.” “그럼, 서울아산병원에서 불쌍한 사람 많이 도와줄 테니까 할아버지도 미안하다는 말씀 이제 그만하시고, 기도해주시겠단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자,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필자는 할아버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꾹 눌렀다. 할아버지가 그제서야 환하게 웃는다.


만 원의 행복 

필자는 신을 잘 모른다. 교회나 성당에도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할아버지가 믿는 그 분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믿는다. 얼떨결에 딸려온 작은 쇠붙이에도 아파할 만큼 여리고 순결한 영혼의 기도를 그 분도 기쁘게 들어주실 것임을 말이다.  

아, 한 가지 빠트릴 뻔 했다. 편지 심부름을 한 대학생이 우리 병원에 꼭 전해달라는 말이 있다. 김주호군의 여동생은 네 살 때, 그리고 여섯 살 때 우리 병원에서 소아뇌졸중(모야모야병)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멋지게 수술해준 나영신 교수(신경외과) 덕분에 여동생은 올해 열여덟 왈가닥 여고생이 됐단다. 할아버지의 만원을 받아들고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스러웠지만, 이런 심부름이라도 해서 자신도 우리 병원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 착한 만 원은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Storytelling Writer 윤정화
출처: 서울 아산병원 건강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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