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산대사 선가귀감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어른은 이렇게 노래했다.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이것이 한 물건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길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연이다. 육조(六祖)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느냐?" 신회(神會)선사가 곧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庶子)가 된 연유다.
회양(懷讓)선사가 숭산(崇山)으로부터 와서 뵙자 육조스님이 묻기를 "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할때에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와서 말하기를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맏아들이 된 연유다.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세상에 출현하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이다.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대비심(大悲心)으로 근본을 삼아 중생을 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 물건으로써 따진다면 사람마다 본래 면목이 저절로 갖추어졌는데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라 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러므로 부처님이 중생을 건진다는 것도 공연한 짓인 것이다.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부처라 혹은 중생이라 하지만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은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참선하는 이는 항상 이와 같이 돌이켜 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四大)로 이루어진 더러운 육신이 순간 순간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달린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히 시비를 일삼고 있지나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 생각을 이루고 있는가?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룰수 있는가?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이런 것이 참선하는 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되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이 말하기를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언제 건지랴! " 하지 않았는가.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마군의 길을 이룰 뿐이다.
만약 계행(戒行)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했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면, 부처님이 늘 계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름지기 풀에 매여 있고 거위를 살리던 옛일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애정은 윤회의 근본이 되고 , 정욕은 몸을 받는 인연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음란한 마음을 끊지 못하면 티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하셨고
또 "애정에 한번 얽히게 되면 사람을 끌어다 죄악의 문에 쳐 넣는다"고 하셨다. 애욕의 불꽃이란 애정이 너무 간절하여 불붙는 듯함을 말한 것이다.
출가하여 스님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고 죽음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三界)에서 뛰어나와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衲子)는 풀 속에 묻힌 야인(野人)만도 못하다. 제왕의 자리도 침 뱉고 설산에 들어가신 것은 부처님이 천 분 나실지라도 바뀌지 않을 법칙인데 말세에 양의 바탕에 범의 껍질을 쓴 무리들이 염치도 없이 바람을 타고 세력에 휩쓸려 아첨을 하고 잘 보이려고만 애쓰니, 아 그 버릇을 어쩔 것인가.
마음이 세상 명리에 물든 사람은 권세의 문에 아부를 하다가 풍진에 부대끼어 도리어 세속 사람의 웃음거리만 되고 만다. 이런 납자를 양의 바탕에 비유한 것은 그럴 만한 여러가지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불자여, 그대의 한 그릇 밥과 한 벌 옷이 곧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인데, 도의 눈이 밝지 못하고야 어찌 삭여낼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오늘날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거저 먹는 그런 부류들의 미래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무슨 심사일까, 참으로 딱한 일이다. 눈앞의 쾌락이 후생에 고통인 줄을 생각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도를 닦는 이는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서방이 와서 갈고 이생원이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내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남들이 와서 내 돌에 칼을갈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니랴.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이므로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하거나 아까와 할 것이 없다. 더구나 백 년을 잘길러 준대도 숨 한번에 은혜를 등지고 마는 것을.
모든 업이 이 몸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몸은 애욕의 근본이므로 그것이 허망한 줄 알게 되면 애욕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를 탐착하는 데서 한량없는 허물과 근심 걱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 특별히 밝혀 수행인의 눈을 띄어주려는 것이다.
네 가지 요소(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에는 주인 될 것이 없으므로 네 가지 원수가 모였다고도 하고, 네 가지 은혜를 등지는 것들이므로 네 마리 독사를 기른다고도 한다. 내가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일로 화도 내고 깔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도 또한 허망함을 깨닫지 못해 나로 인해 성내고 깔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두 귀신이 한 송장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나 다를 것 없다.
죄가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氣像)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쳐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罪業)이 붙어있을 곳이 없다.
수행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똑바를 줄과 같아야 한다"고 했으며 "바른 마음(直心)이 곧 도량(道楊)이다"라고 하셨다. 이 몸에 탐착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나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범부들은 눈앞 현실에만 따르고 수행인은 마음만을 붙잡으려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가지를 다 내버리는 이것이 참된 법이다. 현실만 따르는 것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인 줄 알고 찾아가는 것 같고 마음만을 붙잡으려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바깥 현실과 마음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병통이기는 마찬가지다.
자료: 화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