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마어록
*달마(達摩)*
? - 543 서천 28조의 제28조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다.
그는 파사국 또는 향리국 국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원각대사(圓覺大師)이다. 대승에 뜻을 두고 명상했으며 외국에 포교하기 위해서 남중국에 왔다. 그 후 북쪽의 위나라로 가서 일이 잘되어 여러 가지 선(禪)의 가르침을 폈다. 특히 나이 어린 도육(道育)과 혜가(蕙可)라는 두 사람의 승려가 그를 받들면서 4-5년에 걸쳐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수행은 벽관, 벽을 향해서 좌선을 하는 것으로 마음이 본래부터 깨끗한 도리를 깨닫는 것이다.
1.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안에 있다.
도(道)에 이르는 길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원리적인 방법이란 가르침에 의해서 본질을 알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똑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감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등지고 실체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은 경전을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무언중에 원리와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그 네 가지는 첫째 억울함을 참고,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며, 셋째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넷째 다르마(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불행을 만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본질적인 것에서 등을 돌리고 하찮은 것을 위해 살았으며, 여러 가지로 존재의 겉모습을 바꾸어 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자주 화를 내었고, 수없이 계율을 위반하는 죄를 범했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벌을 받고 있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언제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나는 열린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않으리라."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불행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리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억울함을 참으로써 그대는 도(道)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아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만일 우리가 어떤 큰 보상,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세속의 즐거움 따위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른다.
셋째,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항상 무엇인가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다. 그들의 이성은 세상의 길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은 마음을 성스러운 곳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킨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육체가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넷째는, 다르마(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진리를 일컫는다. 이 진리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텅 빈 공(空)이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는 어떤 존재도 포함하지 않는다. 존재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르마에는 자아가 없다. 자아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고 확신하여서 다르마에 따라 실천한다.
다르마 그 자체는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생명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베푼다. 그들은 후회하지도 않고, 주는 자와 받는 자라든가 선물을 준다던가 하는 허영심이 없으며, 선입견도 집착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를 도와 더러움을 씻게 하지만 형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수행을 통해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자비의 덕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른 덕들을 행한다. 하지만 망상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여섯 가지의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는 환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 곧 고통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것이야 말로 축복이다." 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안에 있다.
2. 본성 이외에 더 이상의 부처는 없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 이르기 위해 스승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그가 십이연기설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받는다.
옛날에 선성 비구는 그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성비구도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소용이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다른 곳으로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 찾아야 할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진리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그대는 힘껏 노력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헛되이 겪지 말라. 부질없이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눈을 떠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그대는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가 불성을 갖고 있는 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백만 중에 하나 정도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붓다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뛰어난 천부적인 깨달음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스로의 지도 아래서 그대는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 불법을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붓다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 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비를 부르는 양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들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망상에 빠져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은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에 충성하는 것이지 붓다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3. 결코 생사의 거래가 없다.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조건에 따른 것이며 업에 따른 결과다. 그것은 인과 응보의 결과다. 그것이 윤회의 바퀴를 돌린다. 그대가 삶과 죽음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짓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한 생각이나 한 힘, 한 지식이나 한 견해에 매달리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마음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그는 깨달음이나 수행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원인과 결과로부터 자유롭다. 부처는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부처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만약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술 취한 자와 같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논리적인 사고를 멈출 수가 있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 우리에게 모든 순간이나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면, 왜 누군가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꾸어 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예, 바로 접니다."
그러면 그대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것들은 그대와 별개의 것인가?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이 몸이 그대의 진짜 몸이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신참자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진짜 몸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4. 자신의 본성을 보는 이는 도를 찾는다.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상상하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하나의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의 숭배하면 안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온갖 가장을 하고서 보살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가짜다.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도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숭배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말아라.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깨어 있음'을, '불가사의한 깨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불가사의하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 부처가 곧 도(道)이다. 그 도가 선(禪)이다. 그러나 선이란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만약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구절의 글도 읽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도를 찾을 수 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그것은 또 다시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을 직접 마실때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 알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아는 그것은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중생의 깨어 있음은 결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외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그들은 도를 잃는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안다면, 집착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 나면 경전 전체가 덧없는 장광설로 들릴 것이다. 수천 가지 경문이 하나의 밝은 마음에 못 미친다.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교리가 무슨 쓸모인가?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는 말의 차원이며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들은 궁전이든 마차든 밤중의 꿈에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그것들을 가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죽음이 왔을 때 한순간만 머뭇거려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나 망상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대는 헛되이 고통받는다. 그대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본래의 존재와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집착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5.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깍을 필요가 없다.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는 배움에 있어서 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붓다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암기하는 일이었다. 아라한들은 붓다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붙들려 있다. 그러한 것이 중생의 업이다.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행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은 붓다를 모독한다.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外道)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다. 속인도 부처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으면 한낱 광신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일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면 성이란 기본적으로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 속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음에 따라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설령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온(五蘊)의 허깨비 몸 속에 살지언정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더렵혀질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 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조차도. 그대는 모든 것을 탈바꿈 시킬 것이다. 그대는 막힘 없는 영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과 사의 바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보면 그대는 이미 부처다. 설령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도살함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한다. 인도의 스물 일곱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 온 단 한가지 이유는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즉각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계율이나 헌신 혹은 고행 수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떠남 없이 떠나고, 봄 없이 보고, 웃음 없이 웃고, 들음 없이 듣고, 앎 없이 알고, 기뻐함 없이 기뻐하고, 걸음 없이 걷고, 머무름 없이 머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에 이른다. "언어를 넘어서 가라. 생각을 넘어서 가라."
나는 계속할 수도 있지만, 이 간단한 설법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6. 깨어 있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모든 열매와 꽃들, 모든 가지와 잎들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비순수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위에 기뻐하며, 비순수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비순수함에 영향받지 않는 사람이 곧 성인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비순수한 마음의 덫에 걸리고 자신의 업에 얽매인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는 번뇌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비순수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흐려 놓기 때문이다.
십지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불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 그러나 한번 오온(五蘊)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항아리 안의 빛처럼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이다. 자신도 깨어 있고 남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로부터 모든 덕의 열매와 열반의 열매가 자란다.
7.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 진정한 문을 찾는다.
"그러나 욕장경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공덕을 쌓는 외부적인 실행의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여기서 승려들의 목욕이란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것을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붓다는 욕장경을 설하면서 제자들이 목욕의 다르마를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일상적 관심사를 이용한 것이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가 지혜의 불을 밝힐 때 그대는 계율의 순수한 물을 데워서 그대 안의 진정한 불성을 목욕시킨다. 이 일곱 가지 수행을 잘 지킴으로써 그대는 덕을 쌓는 것이 된다. 그 시대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붓다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형태가 없다. 그리고 고뇌의 먼지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이 평범한 물로 손에 만져지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언제 그들이 깨어날 것인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는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불결함이 일어나면 그것들은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 버릴 때까지 계속 불어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그대의 것인 이 몸을 씻고자 한다면 그것이 깨끗해질 때가지 그대의 육체가 닮아 없어지도록 문질러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대는 붓다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것의 닦음을 의미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전에는 사람이 모든 마음을 다해 붓다에게 빌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부처는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 그 어느 쪽에서도 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몸과 마음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는 것은 마음에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의 규율들을 끊임없이 마음에 불러내어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따르는 일을 뜻한다. 붓다에게 빌기 위해서 그대는 비는 것의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삼독(三毒)으로 고통을 받는 한, 망상에 빠진 그대의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붓다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의미를 찾으면서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대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인들은 말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키우는데 힘을 썼다. 이 마음이 모든 덕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 모든 힘의 으뜸이다. 니르바나의 영원한 축복은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으로 건너가는 얕은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을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요사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공덕을 생각할 때 형태를 가진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낭비하여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벙어리가 되어 당황한 채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운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한 제자들은 헛되이 자신을 써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향하면서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오직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집중해서 그 빛이 밖으로 비쳐 나오는 것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 번에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함을 얻을 수 있고 진리에 이르는 문을 발견할 수 있다.
세속을 꿰뚫어 보는 것이나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정한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서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출처: 화계사 , 풍경소리 듣는 풀잎(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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