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효대사 발심수행장
부처님이 열반의 세계에 계시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끓고 고행하신 결과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누가 막지 않는 천당이지만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三毒)의 번뇌를 자기의 재물인 양 여기기때문이며, 유혹이 없는데도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네 마리 독사와 다섯 가지 욕락을 그릇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그 누군들 산중에 들어가 도 닦을 생각이 없으랴마는, 저마다 그렇지 못함은 애욕에 얽혀 있기떄문이다. 비록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는 못할지라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착한 일을 버리지 말라. 세상의 욕락을 버리면 성현처럼 공경받는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과 같이 존경받을 것이다.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스러운 마음을 베푸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로운 이의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들어선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아갈 곳이다. 주리면 나무열매로 그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야 갈증을 풀어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다한들 언젠가 죽을 것이고, 비단옷으로 감싸 보아도 목숨은 마침내 끓어지고 만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퍼 울어예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으라. 예배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시려도 불을 생각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도 먹을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길래 닦지 안고 놀기만 하겠느냐.
마음속의 애욕을 버린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가죽을 쓴 격이고, 도 닦는 사람이 애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마을에 사는 사람은 부처님이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설사 도행(道行)이 없더라도 산중에 사는 이는 성현들이 그를 기쁘게 여기신다.
재주와 학문이 많더라도 계행이 없으면 보배 있는 곳에 가려고 하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수행을 부지런히 하여도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을 향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이의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佛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 구나. 행동과 지혜가 갖추어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죽을 받고 축원을 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시주한 이에게 수치스런 일이며, 밥을 얻고 심경(心經)을 외울때에 그 이치를 모른다면 불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사람들이 구더기를 더럽게 여기듯이 성현들은 사문으로서 깨끗하고 더러움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신다.
세간의 시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데는 계행(戒行)이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린 이가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죽지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을 날려는 것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없다.
계행이 없는 살덩이는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덕이 높은 큰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으려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천신들이 모두 찬탄하고, 수도인이 여색을 생각하면 착한 신들도 그를 버린다.
사대(四大)는 곧 흩어지는 것이어서 오래 살기를 보증할 수 없으며,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인데 무엇을 그토록 탐하며, 한번 참으면 길이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도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다. 방패막이 끝없는데 어찌 그리 탐착하며, 다음 다음 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이 일이 한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핑계가 끝이 없는데 끊을 마음을 내지 않는구나.
오늘이 끝이 없는데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이 끝이 없는데 착한 일 하는 날은 많지 못하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이 다하지 않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어느덧 한 달되며, 한 달 두 달이 흘러 문득 한해가 되고 한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얼마를 헛되이 살았으면서 한 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죽고야 말 것이데 내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닌가.
*원효(元曉)*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성은 설(薛)씨 이다. 현재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 불지촌(佛地村)의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진덕여왕 2년 (648)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고 수도에 정진햇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당시의 풍조에 따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육로로 가다가 도중에 고구려병사에게 잡혀서 되돌아 오고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행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크게 깨친바 있었다. 즉 마음이 일어나므로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그는 학승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 서 융화시키고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한다.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曖思想)과 함께 원효대상의 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자료: 화계사